삶예술로서의 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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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비평 무크지 크릿터 1호에 실린 특집기사 <움직이는 별자리들: 포스트 대의제의 현장과 문학들>을 읽은 뒤, 생각과 함께 간단히 정리한 글입니다.

그 어느때보다도 미디어가 발달하고 서로 물리적으로 만나지 않고도 연결되어 있음을 느낄 수 있는 현재에, 사람들은 오히려 ‘모인다’. 이에 대해 저자 김미정은 ‘assembly’라는 단어가 가지고 있는 양면적인 뜻을 이야기하며 설명을 시작해나간다. 우리말로 ‘의회’와 ‘집회’ 는 영어로 둘 다 ‘assembly’에 해당하지만, 실제로는 ‘모인다’는 의미만 공유할 뿐 전혀 다른 말이다.

의회는 대의제적으로서 누군가를 대표하는 자들의 모임이지만, 집회는 스스로 무리를 이루고 자기 표현하는 사람들의 모임이다. 반드시 현장, 오프라인에서 누군가를 만나지는 않으며 일반적으로 미디어가 이 집회의 결속을 다지는 데에 중요한 역할을 하지만, 한편으로는 2010년대 이후 전 지구적 연쇄적 항의 표현에 있어 이 집회가 온, 오프라인에서 여러 다른 지역에서 산발적으로 가시화된 것 역시 사실이다.

다만 과거에는 이러한 집회 속에서 다수의 의견이 마치 모두를 대표하는 것처럼 비춰졌다면, 전혀 다른 사람들과 의견이 범람하는 미디어 속에서 마이너리티가 이전보다 더 가시화된다. 그리고 이 존재들은 “특별한 언어 행위나 통일된 주장 없이 단지 공공의 장에 모습을 드러내는 것만으로도 정치적 의지를 행위화(enactment)했다.”

이들의 움직임은 이전에 이토록 명확하게 관측된 적이 없었기에, 기존에 다수로서 여겨졌던 집단들은 큰 위기의식을 느끼게 되었다. 그리고 대표-위임 관계의 극복을 시도하는 자들과 그것을 신자유주의의 이념 아래 저지하려는 이들 간에 무수한 투쟁이 일어나게 되는데, 양쪽 다 민주주의의 이름붙임을 둘러싸고 누가 진정으로 민주주의의 자격이 있는지에 대한 양상으로 전개된다.

“그러므로 포스트 대의제의 현장은 혼돈과 무질서처럼 보일지 모른다. 하지만 이 현장은 모든 사회적 주체들의 근원적 다양성이 만개하고 있고, 앞서 언급했듯 새로운 자기구성, 자기조직화, 혹은 “모두에 의한 모두의 통치” 문제를 제기한다는 점에서 일단은 무수한 가능성들의 진원지로 보아야 한다.

이러한 투쟁은 “수년간 한국 문화예술계의 변화와 움직임(movement)으로 펼쳐졌다.” 다만 주목할 점은 이 고발과 항의를 시작된 진원지가 평론가 혹은 이름 있는 기성 작가가 아니라, “작가 지망생, 독자의 경험과 고발 등”이었다는 점이다. “기존 문단의 ‘구성적 외부(the constitutive exclusion)’에서 처음 문제가 제기되었고, 이는 공론장 안팎의 네트워킹을 통해 가능했다.”

이것이 어떻게 가능했는가. “지시적이고 표상적이었던 이전의 예술에 비해 오늘날 예술은 ‘직접적’이고 ‘제시적’인 양상으로 바뀌”었기 때문이다. 그럼으로서 “세계의 구축에 참여하는 모든 주체의 다양성과 거기에서 발명될 특이성을 드러낼 수 있”게 된 것이다. 이것은 더 나아가 무수한 개인들의 목소리를 통해서 가시화된다. 그 목소리는 보다 직접적이고, 보다 삶에 가깝다.

“삶, 세계가 텍스트에 직접 육박, 기입될 때 (…) 우리는 그것을 ‘작품’이라 부르기를 주저해 왔다. 그러나 예술 다큐메이션은 예술을 기록(document)하고, 지시(refer)함으로써 예술이 “현존하거나 가시적이지 않다는 점, 오히려 부재하거나 가려져 있다는 사실”을 드러낸다.”

“작품을 접하면서 각자 안의 무언가가 건드려지고 거기에서 각자만의 내밀한 재의미화, 재맥락화가 생길 때 그것이 얼마나 문학적인지를 계측하는 것은 어딘지 혹독한 일이다. (…) 독자는 어떤 매개를 요하는 균질적 대상이라기보다 그 스스로 문학(예술) 과정에 참여하고 작품의 의미를 완성시켜가는 복잡한 주체다.”

“‘별이 총총한 하늘’을 보고 갈 길을 알 수 있었던 시대가 있었다고 한다. 시간도 흐르지 않고 밤하늘의 별을 따라 내면의 격정 등과 겨루지 않고 그 별들의 인도에 따라 주어진 생을 영위하는 것으로 충분한 세계였다고 한다. (…) 그 세계는 외부를 상상치 않고 하늘에 늘 변함없이 놓인 그 별자리에 정초되던 세계였을 따름이다.”

“지금은 스스로가 밤하늘의 별자리를 만들고, 오히려 별자리도 이동시키는 와중의 시대인지 모른다. 외부의 초월적이고 선험적인 준거들이 더는 제 기능을 못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애통함이나 묵념의 대상이 아니다. 필부필부인 우리가 오히려 별이 되고 별자리를 대신할(어쩌면 늘 대신해 왔을) 역량을 갖고 있음을 지금 확인하고 있기 때문이다.”

굿플레이스에서 무수히 대변되는 인간의 유한함과 이웃집의 윤리 (neighborhood ethic) 가 생각나는 글이었다. 치디는 그 스스로 윤리학 수업을 하는 교수이지만 정작 그 자신은 우유부단하며 많은 부조리에 둘러싸여 있다. 많은 철학가의 빛나는 별과 같은 말들이 희미해지는 순간, 치디는 바로 옆에 있는 엘리노어에게서 길을 찾는다. 정답이 아닌, 길을.

우리는 항상 부조리하고 유한한 인간이고, 종종 아니 많이 그릇된 행동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더 나은 선택을 할 수 있다. 이 선택이 결과적으로 선이 될지 악이 될지에 대해서 너무 연연해 하지 말라. 우리는 그때그때 더 나은 선택을 했을 뿐이니까. 우리가 바꿀 수 있는 것은 과거나 현재, 혹은 먼 미래가 아니다. 우리는 단지 더 나은 내일을 희망할 뿐이다.

마지막으로 너무나 마음깊이 사랑하게 된 구절.

“인간(예술)은 늘 주어진 세계에 구속되어 있지만 동시에 그 조건을 극복하고 세계를 다시 구축하는 존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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